인심도심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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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도심의 유래[편집 | 원본 편집]

☞ 원용준, <<한국철학연습>>
☞ 전현희, <퇴계와 율곡의 인심도심설: 주자 심론의 한국적 전개>, <<한국철학논집>> 제41집, 한국철학사연구회, 2014

  • 유교경전 『상서』의 인심, 도심에 대한 언급
 인심은 사욕에 가려지기 쉬워 위태롭고, 도심은 분명하게 밝히기 어려워 미묘하니 오직 정밀하게 생각하고 순일하게 도의를 지켜서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아야 한다.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상서』 「대우모(大禹謨)」)


  • 인심, 도심에 대한 주희의 해석
 허령하면서 영묘, 그리고 명석한 지각의 작용을 갖춘 심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거기에 인심과 도심의 구별이 있다고 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즉 심은 한 측면에서는 형태를 이루는 ‘기’에 의한 사적 편향의 위에 서 있고, 다른 한 측면에서는 천명의 본성에 의한 올바름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지각의 작용도 여러 가지 양상으로 드러나며, 그 때문에 위험하고 안정되지 않은 인심이 있는가 하면 미묘하여 파악하기 어려운 도심도 있게 된다. 
 게다가 인간은 누구나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상지(上智: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진)의 사람이더라도 ‘인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또 누구나 리에 근거하는 본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하우(下愚: 가장 어리석은)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도심’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이 두 마음이 사방 1촌의 마음 속에 뒤섞여 있는데 이를 잘 정리하는 방법을 모르면 인심은 끝끝내 위태롭게 되고 미묘한 도심은 더욱 알기 어려워지게 되어 마침내는 천리에 근거하는 올바름도 저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길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정밀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인심과 도심의 구분을 잘 파악하여 혼동하지 않는 것이고, ‘순일하게 노력한다’는 것은 그 본래의 마음의 정상을 지켜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 점을 항상 실천하여 반드시 도심이 언제나 내 몸 전체의 주재자가 되고 인심이 언제나 도심의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면 위험한 것도 태평, 안정되게 되고, 미묘한 것은 분명하게 밝혀져 자연히 기거동작이나 언어활동에서도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거나 하는 잘못이 없어져 딱 ‘중(中)을 지킬 수 있게 된다.   
 - 주희 『중용장구』 서문

○ 주희에 의하면 마음의 핵심적 기능은 지각임
○ 지각하는 마음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지만 지각 대상에 따라 인심, 도심으로 구분해 볼 수 있음
○ 인심, 도심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관계처럼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본성이 아님. 본연지성이 기질에 내재한 상태가 기질지성이고 기질지성의 본연성이 본연지성임. 예컨대 인간이라는 기질 속에 떨어져 있는 이치는 추위라는 상황에 당면하여 잎 떨구는 본성이 아니라 입고자 하는 본성임. 추위에 잎을 떨구는 초목의 기질지성이나 추위에 입고자 하는 인간의 기질지성은 모두 본영지성이 낳고 낳는 이치, 즉 '생생지리(生生之理)'가 기질을 경유한 결과임
○ 인심과 도심도 두 마음이 아님. 추위에 입을 것을 깨닫는 마음이 기질지성을 지각하는 인심이라면, 입음의 상황에 그 옳음을 깨닫는 마음은 본연지성을 지각하는 도심임. 인심은 반응의 상황 적합성을 결정짓고 도심은 상황에 대한 반응의 이치 적합성을 결정지음
○ 형기의 사사로움은 성명(性命)에 거스르는 옳지 않음을 함축하지 않지만 만일 사사로움의 경계 너머 본연지성에 대한 자각에 이르지 않는다면 남의 홑옷을 벗겨 내가 덧입고자 하는 것과 같이 옳지 않은 감정으로 결과될 수 있음. 따라서 본연지성에 대한 지각을 강화하는 공부, 즉 도심의 주재성을 확보하는 공부가 요청됨


이황의 인심, 도심에 대한 견해[편집 | 원본 편집]

☞ 전현희, <퇴계와 율곡의 인심도심설: 주자 심론의 한국적 전개>, <<한국철학논집>> 제41집, 한국철학사연구회, 2014

 나누어 말하면 인심은 진실로 형기에서 생기고, 도심은 진실로 성명에 근원한다. 합해서 말하면 도심이 인심의 사이에 섞여 나오니, 실상은 서로 돕고 서로 발하는 것으로서 판연히 두 가지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퇴계집>>
 인심은 칠정이 이것이고, 도심은 사단이 이것이니, 두 가지의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퇴계집>>

○ 퇴계는 인심도심을 지각하는 마음이 아닌 발현된 감정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했음. 인심이 곧 기의 발현인 칠정과 같고, 도심이 곧 이(理)의 발현인 사단과 같다고 보았음
○ 하지만 인심과 칠정이 완전 동일하다고 보지는 않았음

 자사가 희노애락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 것은 옳지만, 만약에 인심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고 한다면 옳지 않다. -<<퇴계집>> 권37, <답이평숙(答李平叔)>

○ 칠정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은 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심은 그렇게 말할 수 없음. 인심은 칠정과 달리 이미 사사로움에 한정된 개념임. 퇴계에서 인심은 인간이 몸을 지니고 있기에 생기는 마음으로 그 발생 원인이 처음부터 형기(形氣: 형체와 기운)로 한정되어 있음
○ 퇴계가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려고 한 이유는 사단이 그 선함을 이(理)로부터 보증 받은 감정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며 사단을 느끼는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선함이 증명되기 때문임. 하지만 그 느낌은 조작 불가능함. 억지로 느끼려 한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님. 사단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감정이지 인위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님. 이 지점에서 도심이 중시됨
=> 사단은 스스로를 확충할 수 없으며 도심에 의해 확충됨. 도심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단지 이치의 발현을 수동적으로 감수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발현된 이치를 적극적으로 유지하고 확대, 지속시키는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음


율곡 이이의 인심, 도심에 관한 견해[편집 | 원본 편집]

  • 퇴계의 사단칠정설에 대한 율곡의 비판
 내가 강릉에 있을 때 기명언(기대승)과 퇴계의 사단칠정을 논한 글을 보았다. 퇴계는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명언은 사단칠정이 원래 두 가지 정이 아니라 칠정 가운데에 리에서 발한 것이 사단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여 자의 논의가 끝내 서로 합치되지 못하였으니, 내 개인적으로는 명언(기대승)의 이론이 내 생각과 꼭 맞는다. 대개 성 가운데에는 인, 의, 예, 지, 신이 있고 정 가운데에는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이 있으니 이와 같을 뿐이다. 오상 밖에 다른 성이 없고, 칠정 밖에 다른 정은 없다. 칠정 중에 인욕이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천리에서 나온 것이 사단이다.
 - <<율곡전서>> 권14, <논심성정(論心性情)>

○ 율곡은 이(理)에는 운동성이 없으며 운동은 오직 기의 영역에서 논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음
○ 율곡의 사단칠정설은 감정이 생겨나는 운동 과정에 주목하여 발동 형식의 단일함을 설명하는 데 주안점이 있음
○ 감정의 발동 형식이 하나라는 점에 주목하여 하나의 틀로 인간의 심리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려 했음


  • 율곡의 인심과 도심에 관한 견해

1. 인심과 도심은 두 마음이 아님

 감동하는 것은 본래 형기지만 그 발현됨이 인의예지의 바른 것에서 곧바로 나와 형기에 가려지지 않기 때문에, 이치를 위주로 그것을 지목하여 도심이라 하였다. … 그 근원은 비록 천성에서 나왔지만 그 발현됨이 이목[귀와 눈]과 사지의 사사로움에서 나와 천리의 본 모습이 아니므로, 기를 위주로 그것을 지목하여 인심이라 하였다.
 -<<율곡전집>> 권10 <답성호원(答成浩原)>
 인심과 도심이 비록 명칭은 두 가지이나 그 근원은 단지 하나의 마음일 뿐이다. 발한 것이 혹 이의(理義)를 위하기도 하고, 혹 식색(食色)을 위하기도 하므로 발한 것을 따라 명칭을 달리한 것이다.
 -<<율곡전집>> 권10 <답성호원(答成浩原)>

○ 율곡의 사단칠정에 대한 관점은 인간의 모든 감정은 본성의 발현이지만 기의 운동 과정을 거쳐 나타나는 것이기에 감정이 그 상황에 시의적절하게 드러맞는지 여부는 기의 오염 여부에 영향을 받게 됨

2. 인심, 도심은 모두 성에서 발한 것임. 기의 가림이 있으면 인심이 되고 기의 가림이 없으면 도심이 됨

3. 인심도심종시설(人心道心終始說): 인심과 도심이 서로 처음과 끝이 될 수 있음

 인심과 도심이 서로 처음과 끝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지금 사람의 마음이 성명의 바름에서 곧바로 나왔더라도 혹 그에 따라서 마치지 못하고 거기에 사적 의도[私意]가 섞이게 된다면, 이것은 도심으로 시작하였으나 인심으로 마치는 것이다. 혹 사람의 마음이 처음에 형기에서 나왔더라도 그것이 바른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다면 진실로 도심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혹 바른 이치를 거슬렀더라도 그름을 알고 제재하여 그 욕심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것은 인심으로 시작하였으나 도심으로 마치는 것이다. 생각건대 인심과 도심은 감정과 의향을 겸하여 말한 것이지, 감정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율곡전집>> 권9 <답성호원(答成浩原)>  

○ 발현된 감정이 인심인지 도심인지 정밀하게 구별하여 인심이 인욕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마음이 의향[의(意)]임
=> 의(意): 정(情)이 움직인 후에 정에 비롯되어 계산하고 비교하는 것. 마음이 느낀 바에 의해 헤아린 것을 의미. 의가 마음이 발한 상태라는 점에서는 정과 동일하지만, 의는 정에서 한 걸음 나아가 헤아리고 비교하고 계산하는 마음의 작용을 의미함
○ 선한 감정이라도 얼마든지 사적 의도로 변질될 수 있음. 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각적으로 선한 의지를 지녀야 함
○ 성인의 혈기 또한 보통 사람과 같으니 성인에게도 인심이 있음. 즉 인심이 곧 인욕인 것은 아님. 인심을 오로지 인욕이나 악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인심의 절제와 도심의 확충을 주장함. 도심은 지키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확충해 나가고 인심은 반드시 정밀하게 살펴서 도심으로 절제해야 한다는 것임


오늘의 토론 주제(2022.10.31)[편집 | 원본 편집]

1. 이태원의 너무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있는 하루입니다. 우리가 철학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우리 사회에 대해 오늘의 우리를 성찰하고 내일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안타까운 사건과 관련하여 우리사회에서 작용하고 있는 인심과 도심은 무엇일까요?
2. 율곡은 인심도심종시설을 통해 도심도 인심으로, 인심도 도심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사회의 인심이 도심으로 결말지을 수 있을까요?

오늘의 토론 내용(2022.10.31)[편집 | 원본 편집]

  • 도심

○ 애도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
○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하고자 한 소방, 경찰인력들의 마음


  • 인심

○ 이태원 사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마음
○ 측은한 마음이더라도 인욕으로 대하는 마음(마녀사냥 등)
○ 사건 이후에도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


  • 인심에서 도심으로

○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 개인의 변화(정신/의식의 변화)+사회 제도적 변화
○ 자기성찰과 실천이 중요함
○ 공동체의식을 높여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