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제2편

An_SW
둘러보기로 이동 검색으로 이동

<<장자>> 제2편 <제물론(齊物論)> 간략 소개[편집 | 원본 편집]

☞ 번역문 참조: <동양고전종합DB> (안병주 선생님 역주)

  • 제물론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 곽상: "스스로를 옳다 여기고 다른 사람을 그르다 하며 자신을 아름답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 그 때문에 시비가 비록 달라도 저 사람[피(彼)]과 내[아(我)]가 균등하다."
=> 만물제동의 의미: 만물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고 일체의 사물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
=> 옳고 그름[시비(是非)], 아름답고 추함[미추(美醜)]라는 편견을 떠나 일체의 사물이 모두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세계를 주장한다는 의미로 보고 '제물(齊物)의 이론(論)'으로 보았음
○ 임희일(林希逸, 1193~1271): “물론(物論)이란 사람들의 논의이니 중론(衆論)이라고 말한 것과 같고, 제(齊)는 통일한다는 뜻이니 여러 논의를 합쳐서 하나로 통일시키고자 함이다. 전국시대에는 학문이 같지 않아서 서로 간에 시비를 따졌다. 그 때문에 장자는 시비를 모두 잊고 자연으로 돌아감만 못하다고 여겼으니 이것이 이 편의 명칭을 제물론이라 한 뜻이다."
=> 중론[여러 논의]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의미

<<장자>> 제2편 <제물론>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南郭子綦(남곽자기) 隱机而坐(은궤이좌)하야 仰天而噓(앙천이허)호대 荅焉似喪其耦(답언사상기우)러라
 顔成子游(안성자유) 立侍乎前(입시호전)이러니 曰何居乎(왈하거호)오
 形(형)은 固可使如槁木(고가사여고목)이며 而心(이심)은 固可使如死灰乎(고가사여사회호)아
 今之隱机者(금지은궤자)는 非昔之隱机者也(비석지은궤자야)로소이다
 子綦曰(자기왈) 偃(언)아 不亦善乎(불역선호)아 而問之也(이문지야)여
 今者(금자)에 吾喪我(오상아)호니 汝(여)는 知之乎(지지호)아
남곽자기(南郭子綦)가 팔뚝을 안석에 기대고 앉아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한숨을 쉬는데, 멍하니 몸이 해체된 듯이 자기 짝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안성자유(顔成子游)가 앞에서 모시고 서 있다가 말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육체는 진실로 시든 나무와 같아질 수 있으며 마음은 진실로 불꺼진 재와 같아질 수 있는 것입니까? 지금 안석에 기대고 계신 모습은 이전에 책상에 기대 계시던 모습이 아니십니다.” 자기(子綦)가 이렇게 대답했다. “언(偃, 안성자유)아, 너의 질문이 참으로 훌륭하구나.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렸는데, 너는 그것을 알고 있는가!


<<장자>> 제2편 <제물론> 속 도(道)[편집 | 원본 편집]

 1. 道(도)는 惡乎隱(오호은)이완대 而有眞僞(이유진위)며 言(언)은 惡乎隱(오호은)이완대 而有是非(이유시비)오
 道(도)는 惡乎往而不存(오호왕이부존)이며 言(언)은 惡乎(오호)에 存而不可(존이불가)리오
 道隱於小成(도은어소성)하고 言隱於榮華(언은어영화)라
 故有儒墨之是非(고유유묵지시비)하야 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이시기소비이비기소시)하나니
 欲是其所非(고시기소비)오 而非其所是(이비기소시)인댄 則莫若以明(즉막약이명)이니라
 物無非彼(물무비피)며 物無非是(물무비시)어늘
 自彼則不見(자피즉불견)하고 自知則知之(자지즉지지)하나니
 故曰(고왈) 彼出於是(피출어시)며 是亦因彼(시역인피)라하노라
 彼是(피시) 方生之說也(방생지설야)라
 雖然(수연)이나 方生(방생)이면 方死(방사)요 方死(방사)면 方生(방생)하며 方可(방가)면 方不可(방불가)요 方不可(방불가)면 方可(방가)라 因是因非(인시인비)하며 因非因是(인비인시)니
 是以(시이)로 聖人不由(성인불유)하고 而照之於天(이조지어천)하나니
 亦因是也(역인시야)니라
참된 도(道)는 어디에 숨었기에 이처럼 참과 거짓이 있게 되었으며 참된 말은 어디에 숨었기에 이처럼 시(是, 옳음)와 비(非, 그름)로 갈리게 되었는가. 참된 도(道)는 어디에 간들 있지 않을 것이며, 참된 말은 어디에 있은들 옳지 않겠는가. 도(道)는 작은 성취 때문에 숨어버렸고, 참된 말은 화려한 꾸밈 때문에 숨어버렸다. 그 때문에 유가와 묵가의 시비(是非)가 생겨나게 되어 상대학파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상대학파가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대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은 것이라 하고 상대가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른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명석한 인식[명(明)]을 통해서 판단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모든 존재[물(物)]는 저것[피(彼)] 아닌 것이 없으며 모든 존재는 이것[시(是)] 아닌 것이 없다. 저것[피(彼)]의 입장에서는 (저것[피(彼)]이)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알려고 하면 그것(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저것[피(彼)]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저것[피(彼)]은 이것[시(是)]에서 나오고 이것[시(是)]은 또한 저것[피(彼)]에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혜시의) 저것[피(彼)]과 이것[시(是)]이 상호 간에 성립한다는 주장이다. 비록 그렇지만 나란히 생기고 나란히 죽고, 나란히 죽고 나란히 생기고, 나란히 옳고 나란히 옳지 않으며 나란히 옳지 않고 나란히 옳아서 옳음(是)에 말미암고 그름(非)에 말미암으며 그름(非)에 말미암고 옳음(是)에 말미암는다는 주장(저것, 이것[피시(彼是)]의 상대성에 대한 지적)으로 끝나고 만다. 그래서 성인(聖人)은 (혜시의 저것과 이것이 상호간에 성립한다는 설[피시방생(彼是方生)의 설을) 따르지 않고 (시비에 대한 판단을) 자연[천(天)]에 비추어 본다. 이것이 또한 (상대적인 옳음(是)이 아닌 절대적인) 옳음(是)에 말미암는 것이다.

그것[피(彼)]의 입장에서는 (그것[피(彼)]이) 보이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대상화하지 않는 한 상대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그것[피(彼)]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
스스로를 알려고 하면 그것(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피(彼)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스로 알게 되면 그것을 알게 됨. 곧 자신을 대상화함으로써 스스로 저것[피(彼)]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


 2. 其分也成也(기분야성야)요 其成也毁也(기성야훼야)라
 凡物(범물)이 無成與毁(무성여훼)히 復通爲一(부통위일)이니라
 唯達者(유달자)야 知通爲一(지통위일)하야
 ...
 是非之彰也(시비지창야) 道之所以虧也(도지소이휴야)요 道之所以虧(도지소이휴) 愛之所以成(애지소이성)이니
하나인 도(道)가 분열하면 상대세계의 사물이 성립되고, 상대세계의 사물이 성립되면 그것은 또 파괴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성립과 파괴를 막론하고 (도에 의해) 다시 통해서 하나가 된다. 오직 통달한 사람이라야만 통(通)해서 하나가 됨을 안다. ... 시비가 나타나는 것은 도가 무너지는 까닭이고 도가 무너지는 것은 사사로운 사랑이 생성되는 까닭이다.

상대세계의 사물이 성립되면 그것은 또 파괴된다.: 상대세계의 사물이 성립되면 성립된 그것은 곧 파괴된다는 뜻


 3. 夫道(부도)는 未始有封(미시유봉)하고 言(언)은 未始有常(미시유상)하니
 爲是而有畛也(위시이유진야)하니라
 ...
 故分也者(고분야자)는 有不分也(유불분야)요
 辯也者(변야자)는 有不辯也(유불변야)니라
 曰(왈) 何也(하야)요
 聖人(성인)은 懷之(회지)하고 衆人(중인)은 辯之(변지)하야 以相示也(이상시야)하나니
 故曰辯也者(고왈변야자)는 有不見也(유불견야)라하노라
 夫大道(부대도)는 不稱(불칭)하며 大辯(대변)은 不言(불언)하며 大仁(대인)은 不仁(불인)하며 大廉(대렴)은 不嗛(불겸)하며 大勇(대용)은 不忮(불기)하나니
도는 본시 구별이 있지 않았고, 말은 본시 고정불변의 일정한 의미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일정한 의미가 없는 말로 도를 표현하려 했으니) 이 때문에 사물에 구별이 있게 되었다. ... (사람들은) 사물을 구분하지만 그중에는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사물을 구별하지만 그중에는 구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말하노니, 무슨 까닭인가? 성인은 그것을 품고, 보통사람들은 그것을 구별해서 서로 내보인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구별하지만 그중에는 (구별로는)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큰 도는 일컬어지지 아니하고, 큰 말은 말하지 아니하며, 크게 어진 행위는 어질지 아니하며, 크게 깨끗한 행위는 겸손한 체 아니하며, 큰 용맹은 사납게 굴지 않는다.

<<장자>> 제2편 <제물론>의 마지막[편집 | 원본 편집]

 4. 昔者(석자)에 莊周夢爲胡蝶(장주몽위호접)호니
 栩栩然胡蝶也(후후연호접야)러니 自喩適志與(자유적지여)라 不知周也(부지주야)호라
 俄然覺(아연교)하니 則蘧蘧然周也(즉거거연주야)러라
 不知(부지)케라
 周之夢(주지몽)에 爲胡蝶與(위호접여)아 胡蝶之夢(호접지몽)에 爲周與(위주여)아
 周與胡蝶(주여호접)은 則必有分矣(즉필유분의)니 此之謂物化(차지위물화)니라
옛날에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펄럭펄럭 경쾌하게 잘도 날아다니는 나비였는데 스스로 유쾌하고 뜻에 만족스러웠는지라 자기가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 얼마 있다가 화들짝하고 꿈에서 깨어 보니 갑자기 장주가 되어 있었다. 알지 못하겠다. 장주의 꿈에 장주가 나비가 되었던가 나비의 꿈에 나비가 장주가 된 것인가? (세속의 입장에서 보면) 장주와 나비는 분명한 구별이 있으니 (이처럼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되는 것) 이것을 물(物)의 변화[물화(物化)]라고 한다.

물화(物化): 장자의 중심사상의 하나임. 물화를 만물이 끊이질 않고 변화한다는 의미로 보기도 하고, 죽음을 매개로 해서 다른 사물로 변화한다는 견해 등이 있음


오늘의 토론주제(2022.10.11)[편집 | 원본 편집]

1. 나와 정말 안맞는다고 생각해왔던 사람을 떠올려보세요. 왜 안맞는다고 생각하나요?2. 장자의 도의 관점에서 1을 다시 돌이켜본다면?

오늘의 토론내용(2022.10.11)[편집 | 원본 편집]

나와 정말 안맞는다고 생각해왔던 사람을 떠올려보세요. 왜 안맞는다고 생각하나요? 

○ 우리가 안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특징: 고집부리는 사람, 자기 잘못을 타인에게서 찾는 사람, 내로남불, 이기적인 사람
○ 상대에 대한 공감, 배려 능력이 부족해서 안 맞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 있음
○ 나의 관점에서, 나의 기준에서 이기적인 사람이지만 절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음
=> 이 경우엔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해 반성이 필요할 수 있음


장자의 도의 관점에서 1을 다시 돌이켜본다면?

○ 싫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싫어한 것임. 나의 주관적인 인식이 상대방을 싫어하게 만든 것일 수 있음
○ 싫다고 여긴 상대의 모습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일 수 있음
○ 도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기적인 사람이 잘못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해석한 것일 수 있음. 내 기준과 감정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본 것일 수 있음
=>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미루고 동등하게 보려는 관점, 만물제동의 관점을 가지려고 해야 함

참고: 장자의 도[편집 | 원본 편집]

☞ 이케다 토모히사(池田知久) 지음, 원용준 옮김, <<노장사상>>

○ 장자의 도는 온갖 만물을 존재하게 하고 운동, 변화시키는 세계의 주재자인 데 반해 만물은 도에 의해 존재되어지고 운동, 변화되어지는 피재자임. 도는 시간, 공간의 존재형식을 초월하고 인간적인 가치에 얽매지 않는 것임. 반면 만물은 시간, 공간의 존재형식 아래에서 인간적인 가치에 매달리는 미약한 존재자임
○ 이처럼 장자의 도는 일체의 모습, 형태를 가지지 않음. 그런 까닭에 인간의 감각, 지각을 통해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일(一)의 무(無)'임. 반면 만물은 제각각 구체적인 모습,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감각, 지각을 통해 파악되는 '다(多)의 유(有)'임

 스승이여, 나의 스승인 도여. 만물을 잘게 부수어서 그것들 하나하나를 성립시키면서도, 의(義)의 덕을 행하는 것은 아니고, 만세의 끝까지 미치는 은혜를 내려주시면서도, 인(仁)의 덕을 베풀고 있는 것은 아니며, 오랜 옛날부터 성장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면서도, 장수를 자랑하는 것은 아니고, 천지를 포용하여 만물을 여러 가지 형태로 조각하면서도, 교묘한 기술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장자>> <대종사>


 원래 도라는 것은 진실로 실재하고 진실로 작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무위의 작용이고 형태가 없는 실재이다. 그것은 말로 전달할 수는 있어도 받을 수는 없고, 스스로 체득하는 것은 가능해도 눈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이 도는 자신 속에 존재 근거를 가지고, 천지가 생기기보다 아득한 이전의 태고부터 이미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며, 귀신에게 영묘함을 주고, 상제에게 신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하늘을 낳고, 땅을 만들어 왔다. 그것은 우주의 최극단보다도 더 높고, 세계의 가장 밑바닥보다도 더 깊은 것이며, 천지의 생성보다도 더 이전부터 존속하여, 상고부터 성장해서 지금에 이르면서, 영겁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계속 작용한다. -<<장자>> <대종사>

○ 이케다 토모히사는 <<장자>>의 도-만물에 관한 논의에 대해, 여기에서의 중심문제가 인간소외의 극복이나 주체성의 확립에 있다고 보았음. 즉 '만물제동'의 철학 하에 존재, 변화되는 만물의 하나에 불과한 인간이 세계의 궁극적 근원적 실재인 도에 도달하고 도를 파악함으로써 도가 지니고 있는 전능한 능력, 즉 온갖 만물을 존재, 변화시키는 주재자적 성격을 자기의 것으로 수중에 넣고 이를 통해 마침내 인간 소외를 극복하고 주체성을 확립하여 스스로 시공간을 초월한 주재자, 자유로운 참된 실재로서의 인간이 되어 세계에 나서는 것을 그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보았음

내 삶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는 삶의 주재자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존재되어지고 살아지고 있는 삶의 피재자로 살아지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