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박괘와 복괘로 생각해 보는 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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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흥망성쇠의 이야기를 확장시키면 인간의 태어나고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역』의 흥망성쇠의 원리를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박괘(剝卦)와 복괘(復卦)[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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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괘(剝卦), 깎임[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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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괘의 순서: 현행본 『주역』의 23번째 괘
  • 박(剝)의 의미: 박괘의 ‘박(剝)’은 일반적으로 깎여서 떨어진다는 ‘박락(剝落)’의 의미로 쓰이고 있음. 이를 음양소식(陰陽消息: 음양이 깎이고 자라남)의 관점에서 설명하곤 함. 즉 음이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해서 양을 변화시켜 양이 깎여 떨어져나가는 상(象)으로 해석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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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괘는 다섯 효가 음효로 이루어져 있어 소인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해석되기도 함. 양이 군자의 상징을 가진 데 반해 음은 소인의 상징을 지니고 있음
  • 박괘는 초효의 소인으로 상징되는 음효가 점점 이효, 삼효, 사효, 오효로 올라가면서 자라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며, 이는 소인의 세력이 강해져서 군자의 세력이 약해지고 있는 상황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임


박괘의 마지막, 상구 효사[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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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九(상구)는 碩果不食(석과불식)이니 君子(군자)는 得輿(득여)하고 小人(소인)은 剝廬(박려)리라.
 상구는 큰 과일은 먹지 않으니(큰 과일이 먹히지 않으니) 군자는 수레를 얻을 것이고 소인은 오두막집마저 허물어뜨릴 것이다.

=> 군자는 힘겨운 시기에도 큰 과일이 될 싹을 먹어 치우지 않고 기다림. 마침내 사람들의 신뢰와 여론을 얻고 명예를 얻게 됨. 소인은 그 반대임


복괘(復卦), 회복함[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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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괘의 순서: 현행본 『주역』의 24번째 괘
  • 복(復)의 의미: 복(復)은 돌아온다는 의미를 지님. 「서괘전」에 복괘가 박괘(剝卦) 다음에 온 이유에 대해 “사물이 끝내 다 깎일 수만은 없으니 위에서 궁극에 달하면 아래에서 돌아오기 때문에 박괘 다음에 복괘로 받았다(物不可以終盡剝, 窮上反下, 故受之以復).”라고 했음
  • 참고: 유배지에서 다산의 『주역』꿈

☞ 김윤규, 「장기 유배기 다산 시의 성격」, 『동방한문학』 57권, 동방한문학회, 2013.12, 253~261쪽

○ 1789년 28세에 급제한 이후 1800년 정조(1776~1800)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조는 다산을 총애했으며,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각별한 군신관계를 지속했음
○ 왕의 전폭적인 신뢰 하에 승진을 거듭했던 그는 정조의 특별한 총애와 다산이 지닌 뛰어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게 됨. 특히 그는 당시 천주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혐의로 논란이 되고 있었으나 정조는 여전히 다산을 신뢰했음
○ 1800년 39세 때 끊이지 않는 비방과 질시를 잠시 피하기 위해 낙향해 있던 다산은 정조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됨. 이듬해 1801년 신유년, 신유박해와 함께 그는 인생의 고난의 시기를 마주하게 됨.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이에 호의적인 집단을 보호했던 정조의 죽음 이후, 정치적 숙청의 일환으로 천주교 신자와 그의 가족들을 처단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됨. 이 때 다산도 억울하게 귀양길에 오르게 됨
○ 1801년 봄에 장기(長鬐)로 귀양을 갔는데, 그해 가을에 나의 운명을 점쳐[筮] 둔지복괘(屯之復卦)를 만난 꿈을 꾸고서는 깨어나서 기뻐하며 ‘처음에는 둔(屯)했으나 그 둔이 변하여 양복(陽復)이 되었으니 종당에는 경사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음. 여기에서 둔괘는 어려움을 뜻하는 괘임. 하지만 복괘는 온통 음으로 춥고 어두웠던 시절에 아래에서부터 따뜻한 양효의 새싹 하나가 피어오르는 괘로, 회복, 돌아옴을 의미함. 하지만 경사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더 먼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됨
○ 하지만 1801년 그해 10월 그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에 적어 중국 북경에 거주하고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밀서를 보냈다가 발각되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강진으로 더 멀리 유배가게 됨
○ 이후 다산은 강진 유배생활동안 수많은 저작을 남기게 됨


복괘(復卦) 「단전」의 한 구절[편집 | 원본 편집]

 復(복)에 其見天地之心乎(기견천지지심호)인저.
 복(復)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복기견천지지심호(復其見天地之心乎): 복괘에 등장하는 천지의 마음에 대한 언급은 간단했지만 과연 천지의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후대에 여러 가지 논의가 제기되었음
  • 천지의 마음에 관한 주희의 언급들
 『역』에서 “회복됨의 이치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 고 한 것은 또 무슨 뜻인가? ... 정말 마음이 없다면, 소는 말을 낳고 복숭아 나무에 오얏 꽃이 필 것인데, 이것들은 오히려 스스로 정해진 것이 있다.
 易所謂‘復其見天地之心’... 又如何? ... 若果無心, 則須牛生出馬, 桃樹上發李花, 他又卻自定. -『주자어류』
 천지의 마음은 대신할만한 것이 따로 없으니, “(천지의) 큰 덕을 생(生)이라 하니” 단지 만물을 낳을 뿐이다. 나무 한 그루를 생각해보면, 봄에는 꽃피고 여름엔 무성하고, 가을이 되면 열매 맺고 겨울이 되면 완성된다. ... 만약 겨울을 거치지 않으면 씨앗이 완성되지 않는다. 곧장 기를 충분하게 받으면 장차 서로 이별하려 할 때에 천 개의 열매가 종자가 되어 천 그루의 나무가 되니, (박괘 상구의) “큰 열매는 먹지 않는다”와 같은 것이 이것이다. 바야흐로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이 되는데에는 각기 생의(生意)가 있다. 겨울이 되었을 때, 마치 나무에 생의(生意)가 없는가 의심하는 것은 도리어 스스로 수렴하여 아래(뿌리)에 두고 있음을 모르는 것이니, 모든 열매는 각기 생리(生理)를 갖추고 있으니 낳고 낳아서 끝이 없는 뜻을 다시 볼 수가 있다. 
 天地之心, 別無可做, ‘大德曰生’, 只是生物而已. 謂如一樹, 春榮夏敷, 至秋乃實, 至冬乃成. 雖曰成實, 若未經冬, 便種不成. 直是受得氣足, 便是將欲相離之時, 卻將千實來種, 便成千樹, 如‘碩果不食’是也. 方其自小而大, 各有生意. 到冬時, 疑若樹無生意矣, 不知卻自收斂在下, 每實各具生理, 更見生生不窮之意. -『주자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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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소진하지 않는 곳에 천지(天地)의 마음이 있다. 그러나 모두 소진(消盡)한 곳에도 또한 천지의 마음이 있다. 그러나 저것이 저렇게 새롭고 신선한 것과 같지 않으니 이렇게 머리를 맞대어 재생(再生)하는 것으로 말하면 천지(天地)의 마음을 친절하게 볼 수 있다. 
 其消之未盡處, 固天地之心也. 然那消盡底, 亦天地之心也. 但那箇不如那新生底鮮好, 故指那接頭再生者言之, 則可以見天地之心親切. -『주자어류』


그렇다면 우리의 생사(生死) 문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자신만의 생사관을 가지고 계신가요? 우리의 생사 문제에 대해 『주역』이 전해줄 수 있는 지혜가 있을까요?


『주역』속 사생(死生), 종시(終始)[편집 | 원본 편집]

『주역』에서는 생사(生死), 시종(始終)이라는 표현보다 사생(死生), 종시(終始)라는 표현을 더 많이 썼습니다. 왜일까요?


☞ 이선경, 「주역의 죽음관」, 『동양철학연구』제107집, 동양철학연구회, 2021.8.28

  • 역은 변화의 철학으로서 궁극적 종말은 없다고 했지만 『주역』에도 시작과 끝을 나타나는 용어와 개념이 있음. 다만 '멸(滅)'의 개념은 보이지 않으며, '사생(死生)'과 '종시(終始)'라는 용어를 사용했음
 原始反終(원시반종): 시작에 근원하여 마지막을 반추한다
仰以觀於天文(앙이관어천문)하고 俯以察於地理(부이찰어지리)라 是故(시고)로 知幽明之故(지유명지고)하며 原始反終(원시반종)이라 故(고)로 知死生之說(지사생지설)하니라 우러러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몸을 굽혀 땅의 이치를 관찰한다. 이 때문에 유명(幽明)의 이유를 알고 시작에 근원하여 마지막을 반추한다. 그래서 사생(死生)의 이론을 안다.(『주역』「계사전」)

=> 주희는 '시종', '사생'을 순환으로 이해했음
=> 정이는 사생의 이치를 터득하는 일은 원시반종의 탐구 결과로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음. 사계절 순환의 이치와 사생의 이치는 하나의 종류라고 보았음
=> 왕부지(王夫之, 1619~1692)는 '원(原)'이란 근본이 있어서 생겨난다는 뜻이며 '반(反)'이란 그 예전에 왔던 곳으로 되돌아감의 의미라고 보았음

그러고보니 우리는 어떤 사람의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합니다. 왜일까요? 어디로 돌아간다는 것일까?
 易之爲書也(역지위서야) 原始要終(원시요종)하여 以爲質也(이위질야)니
 역이라는 책은 시작을 근원적으로 추궁하고, 마침을 밝히는 것으로 바탕을 삼는다.(『주역』「계사전」)
 
 大明終始(대명종시)하면 六位時成(육위시성)하나니 時乘六龍(시승육룡)하여 以御天(이통천)하나니라.
 종시를 크게 밝히면 여섯 자리가 때에 맞게 이루어져서, 때에 맞게 여섯 마리의 용을 타고 하늘을 다스린다.(『주역』건괘 「단전」)

 天地之大德曰生(천지지대덕왈생).
 천지의 큰 덕(德)을 생(生)이라고 한다.(『주역』「계사전」) 


 生生之謂易(생생지위역).
 낳고 낳음을 역(易)이라고 한다.(『주역』「계사전」) 
왜 생사생사(生死生死)라고 하지 않고 생생(生生)이라고 했을까요?


오늘의 토론 주제(2023.10.23)[편집 | 원본 편집]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있는 시대인 만큼 죽음 공부도 의미 있는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 <퇴계 스스로가 작성한 자신의 묘비명: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 퇴도(退陶)는 이황이 즐겨쓰던 아호의 하나이며, 만은(晩隱) 역시 늦게 은거했다는 뜻으로 퇴계 자신을 가리킴
○ 묘비에 관직을 적지 않았고, 묘비명도 다른 사람이 과장하여 쓸까봐 생시에 손수 써 두었음

퇴계묘비명.jpg

그림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 生而大癡
 장성하여서는 병이 많았네 / 壯而多疾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좋아했으며 / 中何嗜學
 말년에는 어찌 벼슬에 올랐던고 / 晩何叨爵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 學求猶邈
 관작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 / 爵辭愈嬰
 세상에 진출하면 실패가 많았고 / 進行之跲
 물러나 은둔하면 올발랐네 / 退藏之貞
 국가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 深慙國恩
 성인의 말씀이 참으로 두려워라 / 亶畏聖言
 산은 높이 솟아 있고 / 有山嶷嶷
 물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 有水源源
 선비의 옷을 입고 한가로이 지내니 / 婆娑初服
 뭇 비방에서 벗어났네 / 脫略衆訕
 내 그리워하는 분 저 멀리 있어 볼 수 없으니 / 我懷伊阻
 나의 패옥 누가 구경해 주리 / 我佩誰玩
 내 고인을 생각하니 / 我思故人
 실로 내 마음과 맞는구나 / 實獲我心
 어찌 후세 사람들이 / 寧知來世
 지금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랴 / 不獲今兮
 근심스러운 가운데에 낙이 있고 / 憂中有樂
 즐거운 가운데에 근심이 있네 / 樂中有憂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 乘化歸盡
 다시 무엇을 구하리 / 復何求兮

번역문 출처: 한국고전종합DB 『고봉집』「퇴계(退溪) 선생 묘갈명(墓碣銘)」


1. 평소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오셨나요? 2.『주역』이 줄 수 있는 삶과 죽음의 이치에 대한 지혜는 무엇일까요? 


오늘의 토론 내용(2023.10.23)[편집 | 원본 편집]

  • 죽음 그 자체가 생

○ 사생 단어 자체가 생을 강조. 사가 있어야지 생이 존재함. 그렇기에 생생이라고 표현한 것이 죽음 그 자체가 생이기 때문에 동어반복을 피한 것이라고 생각함. 불교의 회귀사상과 연관(계속 돌아간다.) 생과 사의 과정 중에서도 생에 집중한 것을 보면 현생에 집중하는 유가적 사상을 엿볼 수 있음

  • 순환의 이치로서의 죽음, 죽음을 통해 생의 처음으로 돌아감

○ 생사 말고 사생이고 한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함
○ 그리고 생사말고 생생으로 한 것 또한 죽음이 단절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돌아간다는 표현처럼 죽음을 통해 생의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함. 그래서 돌아간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싶음
○ 돌아가지 않으면 단순히 죽는다. 이렇게 단절된 표현을 썼을 것임. 그렇기에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 순환의 이치라고 생각함

  • 당연한 삶의 이치로서의 순환과정

○ 주희 생각대로 순환의 과정. 물의 순환과정 (아래에서 위로, 다시 아래로) 이처럼 생사도 순환의 과정. 그 당시에는 자식을 낳는 것이 당연한 것. 나는 시간이 흘러서 죽지만 새로운 생명이 다시 탄생하고 그 새로운 생명이 새로운 생명을 낳고, 생이 생을 낳고. 그 생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사로 갈 것임. 이는 너무 당연한 삶의 이치임
○ 일반적으로 죽음을 부정적으로 인식함. 주역에서 보았을 때는 죽음을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가치판단의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함. 자연의 이치정도로 이야기함. 죽으니까 안 좋고 태어나서 좋다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치적인 내용을 의미하는 것 같음. 그래서 삶에 대해 조금 더 초연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임

  • 삶과 죽음의 유기성

○ 삶과 죽음이 떨어져 있는 이분법적인 개념이 아닌 유기적인 것. 죽음은 삶의 끝맺음이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마저 삶의 일부분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은 우리 삶의 일부
=> 주역이 '생사생사'가 아닌 '생생'으로 표현한 점또한 같은 이유일 것
=> 우리 삶 속 음양의 순환에서 확장하여 인간이 자손을 통해 대를 잇는 과정 또한 생과 사가 순환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음

  • 인간의 인식 구조 속 주관적인 생사 인식

○ 칸트 : 인간 인식 구조 (시간 공간이 존재하는게 아니고 시간 공간이 인간의 틀이라고 생각)
○ 이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 시간 공간 -> 실제 생과 사의 관계가 역전될 수도 있고 그대로일수도 있고. 죽는 것이 시간 순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따라 달라질 수 있음
○ 생에서 사로 가는 것인지 사에서 생으로 가는 것인지는 주관적임

  • 사회적 죽음

○ 육신이 죽는 것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죽는것도 죽음임. 사람이 한번 죽어보면 대인 소인 구분됨. 통장잔고0=죽음. 대인은 다시 시작할것임. 소인은 좌절하고 한탄하며 살 것임.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대인이 되고 소홀히 한 사람은 소인이 됨

  • 인생을 되돌아보는 과정으로서의 죽음

○ 죽음이 생물학적 죽음이라고 했을 때,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보내는데, 주마등처럼, 그때 삶을 되돌아보면서 한번 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고 생각함. 죽음 이라는 말이 생명 뿐만 아니라 무언가가 끝난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생각함. 죽음은 생명이 다했다, 소진되었다는 뜻임. 주역에서 끝은 시작과 이어져 있다고 하는데, 무언가가 소진되면 다른 것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