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흠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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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 정약용이 유배시절에 쓴 책, 흠흠신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잘 알려져 있듯이 강진에서 18년 유배생활을 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유배 기간 중 다산초당이라는 조그만 집에 기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지요. 그 결과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저술이 바로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입니다. 유배 중에 이처럼 위대한 저술을 완성하였기에 어떤 이들은 다산이 유배생활을 그렇게 오래 하지 않았으면 과연 그와 같은 저술을 남겼겠는가? 라고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맞는 말입니다. 다산 선생은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이 같은 대작을 남기게 한 것입니다.
☞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여유당전서' 설명


  • <<흠흠신서>> 서문에서 밝힌 이 책을 지은 목적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니,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을 수령이 그 중간에서 선량한 사람은 편안히 살게 해 주고, 죄지은 사람은 잡아다 죽이니, 이는 하늘의 권한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 뿐이다. 사람이 하늘의 권한을 대신 쥐고 행하면서도 삼가고 두려워할 줄을 몰라 세밀한 부분까지 명확하게 분별하지 못하고서 소홀히 하고 흐리멍덩하게 처리하여, 살려야 하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죽여야 하는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태연히 편안하게 지낸다. 더구나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고 여자에게 미혹되기도 하면서, 백성들이 비참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도 가엾이 여겨 구제할 줄을 모르니, 이는 매우 큰 죄악이다. ... 내가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편찬하고 난 뒤, 사람의 목숨과 관계되는 형사 사건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다루는 책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이 《흠흠신서(欽欽新書)》를 별도로 편찬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 [序] (여유당전서 - 정법집 (흠흠신서), 박석무, 이강욱,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

☞ ★ <<흠흠신서>> 번역문 (네이버 지식백과)


다산 정약용(1762~1836)[편집 | 원본 편집]

다산신도시.png

다산신도시


남양주에 다산신도시, 다산동이 있는데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남양주는 이 인물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다산 정약용을 담은 초상화들

정약용초상.jpg

위키백과에 실린 정약용 초상


다산정약용.png

☞ 정약용 표준영정1974년 장우성(張遇聖)이 그린 정약용(丁若鏞) 표준영정.   (ⓒ한국은행)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약용(丁若鏞))


중앙일보 정약용.jpg

<<중앙일보>>에 실린 정약용


=> 남양주 다산유적지 구경가기


다산 정약용을 모티브로 한 콘텐츠들

조선명탐정.jpg

조선명탐정 소설


조선명탐정영화.jpg

☞ 조선명탐정 영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 다산 정약용의 일생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첫째 단계: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

-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부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진주 등을 다니며 유교경전을 익히고 과거시험을 준비했음
-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했음. 정약용은 서울에 있을 때 성호 이익의 학문과 행동이 순수하고 독실하다는 말을 듣고 그의 남겨진 저작을 찾아보고 책으로 공부했음
-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살게 되면서 당시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 이익의 책을 공부하며 이익을 계승했음

○ <참고: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

- 이익은 1705년(숙종 31년)에 증광시 초시에 붙었지만 다음해 둘째형 이잠(李潛)이 장희빈의 아들 세자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평생 학자로 살아가게 됨
-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 특정 정치 권력을 형성하지 않았지만 신후담(愼後聃, 1702~1761),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윤동규(尹東奎, 1695~1773), 이병휴(李秉休, 1710~1776),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의 걸출한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성호학파를 형성하게 됨
- 이익의 저서들은 기존 선현들의 견해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했던 기록들이 많았음
- 이익을 정약용을 비롯한 제작들이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 다산 정약용이 지은 글 속에 나타남(1795년 이익 사후 32년 후)

10월 온양 서암 봉곡사에 모여 이익이 남긴 글들을 편집했다. 당시 그곳에는 정약용과 함께 이익의 증손자인 이삼환(李森煥), 이광교(李廣敎), 이재위(李載威), 박효긍(朴孝兢), 강이인(姜履寅), 이유석(李儒錫), 심로(沈潞), 오국진(吳國鎭), 강이중(姜履中), 권기(權蘷), 강이오(姜履五), 이명환(李鳴煥)이 함께였다.
당시 그들이 머물었던 봉곡이란 곳은 첩첩산중의 골짜기인데다 이른 눈이 내려 눈이 한 자나 쌓여 있을 정도로 한겨울 추위가 이미 깃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익의 문인들은 이곳에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시냇가에 가 얼음을 깨고 샘물을 떠서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고 저녁에는 산언덕에 올라가 함께 거닐며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낮에는 이익이 남긴 책인 <<질서(疾書)>>를 써내려갔는데 이삼환이 교정을 하고 밤에는 여러 문인들과 함께 강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밤새 토론을 하고 새벽 계곡물에 세수를 하며 잠을 깨우면서도 한겨울 추위의 첩첩산중에서의 열흘을 정약용이 즐겁게 강학하던 때로 기록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 <<여유당전서>> <서암강학기>

- 이익은 평생동안 아랫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초학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저술한 내용에 대해 받아들일 만한 말이 있으면 빨리 고치고 잠시고 지체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짐
- 이익의 학문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박학(博學)임. 궁극의 이치를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논의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양한 지식에 근거하여 탐구대상이 되는 학문 주제에 천착하고 이를 통해 정미한 이치를 탐구하는 데 그 방향성이 있었음 - 이익은 그의 부친 이하진(李夏鎭. 1628~1682)이 사신으로 갔던 길에 연경(燕京)에서 구매해 온 수천 권의 서적들 가운데 있던 서양과학, 문물, 서양종교에 관한 서학서적들을 접하게 됨


두번째 단계: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될 때까지

- 관직에 오른 10년동안 정약용은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음
-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 화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음
- 이 시기에 정약용은 이벽, 이승훈 등과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 하지만 그가 천주교 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음. 정약용은 천주교를 서학으로 인식하고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음
- 그러나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했음. 왕의 전폭적인 신뢰 하에 승진을 거듭했던 그는 정조의 특별한 총애와 다산이 지닌 뛰어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게 됨. 특히 그는 당시 천주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혐의로 논란이 되고 있었으나 정조는 여전히 다산을 신뢰했음
- 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1791년의 일임.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이 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했음. 그러나 그는 1801년의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됨


세번째 단계: 유배 이후 다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의 기간

☞ 김윤규, <장기 유배기 다산 시의 성격>, <<동방한문학>> 57권, 동방한문학회, 2013.12, 253~261쪽

- 1800년 39세 때 끊이지 않는 비방과 질시를 잠시 피하기 위해 낙향해 있던 다산은 정조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됨. 이듬해 1801년 신유년, 신유박해와 함께 그는 인생의 고난의 시기를 마주하게 됨.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이에 호의적인 집단을 보호했던 정조의 죽음 이후, 정치적 숙청의 일환으로 천주교 신자와 그의 가족들을 처단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됨. 이 때 다산도 억울하게 귀양길에 오르게 됨

 <유배를 떠나며 쓴 다산의 시>
쓸쓸한 석우촌에서
가야 할 길 세 갈래로 갈리었네 장난하며 서로 우는 두 마리 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나보네 한 마리는 남으로 갈 말이고 한 마리는 동으로 달려야 할 말 제부들께선 머리와 수염 하얗고 큰 형님은 눈물이 턱에 고인다 젊은이들이야 다시 만날 수도 있겠으나 노인들 일이야 누가 알 것인가 잠깐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해가 이미 서산에 기울었네 다시는 돌아보지 말고 가자꾸나 애써 다시 만날 기약을 하면서

- 1801년 봄에 장기(長鬐)로 귀양을 갔는데, 그해 가을에 나의 운명을 점쳐[筮] 둔지복괘(屯之復卦)를 만난 꿈을 꾸고서는 깨어나서 기뻐하며 ‘처음에는 둔(屯)했으나 그 둔이 변하여 양복(陽復)이 되었으니 종당에는 경사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음. 여기에서 둔괘는 어려움을 뜻하는 괘임. 하지만 복괘는 온통 음으로 춥고 어두웠던 시절에 아래에서부터 따뜻한 양효의 새싹 하나가 피어오르는 괘로, 회복, 돌아옴을 의미함
- 하지만 1801년 그해 10월 그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에 적어 중국 북경에 거주하고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밀서를 보냈다가 발각되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강진으로 더 멀리 유배가게 됨


다산유배길.jpg

☞ 출처: <<동아일보>> 길 역사를 따라 문화를 따라 <8>다산 유배의 길 실학사상을 집대성하다


유배지에서보낸편지.jpg]

- 다산이 유배를 떠날 당시 학연은 18세, 학유는 15세의 나이였음. 유배기간 내내 편지를 보내 원격으로 자녀들을 교육하기도 했지만 두 아들을 직접 강진으로 오게 하여 직접 가르치기도 했음
- 그의 강진 유배기는 관료로서는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음.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임
- 정약용은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했음. 그의 개혁안은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의 책으로 남겼음


○ 정약용은 살인 사건의 조사·심리·처형 과정이 매우 형식적이고 무성의하게 진행되는 것은 사건을 다루는 관료들이 법률에 밝지 못하고 사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기술이 미약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이를 바로잡고자 이 책을 집필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