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심도심논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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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은 칠정이 이것이고, 도심은 사단이 이것이니, 두 가지의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퇴계집>> | 인심은 칠정이 이것이고, 도심은 사단이 이것이니, 두 가지의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퇴계집>> | ||
− | ○ 퇴계는 인심도심을 지각하는 마음이 아닌 발현된 감정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했음. 인심이 곧 기의 발현인 칠정과 같고, 도심이 곧 이(理)의 발현인 사단과 같다고 보았음 | + | ○ 퇴계는 인심도심을 지각하는 마음이 아닌 발현된 감정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했음. 인심이 곧 기의 발현인 칠정과 같고, 도심이 곧 이(理)의 발현인 사단과 같다고 보았음</br> |
+ | ○ 하지만 인심과 칠정이 완전 동일하다고 보지는 않았음</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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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사가 희노애락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 것은 옳지만, 만약에 인심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고 한다면 옳지 않다. -<<퇴계집>> 권37, <답이평숙(答李平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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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칠정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은 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심은 그렇게 말할 수 없음. 인심은 칠정과 달리 이미 사사로움에 한정된 개념임. 퇴계에서 인심은 인간이 몸을 지니고 있기에 생기는 마음으로 그 발생 원인이 처음부터 형기(形氣: 형체와 기운)로 한정되어 있음</br> | ||
+ | ○ 퇴계가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려고 한 이유는 사단이 그 선함을 이(理)로부터 보증 받은 감정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며 사단을 느끼는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선함이 증명되기 때문임. 하지만 그 느낌은 조작 불가능함. 억지로 느끼려 한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님. 사단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감정이지 인위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님. 이 지점에서 도심이 중시됨</br> | ||
+ | => 사단은 스스로를 확충할 수 없으며 도심에 의해 확충됨. 도심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단지 이치의 발현을 수동적으로 감수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발현된 이치를 적극적으로 유지하고 확대, 지속시키는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음</br> |
2022년 10월 31일 (월) 09:15 판
인심도심의 유래
☞ 원용준, <<한국철학연습>>
☞ 전현희, <퇴계와 율곡의 인심도심설: 주자 심론의 한국적 전개>, <<한국철학논집>> 제41집, 한국철학사연구회, 2014
- 유교경전 『상서』의 인심, 도심에 대한 언급
인심은 사욕에 가려지기 쉬워 위태롭고, 도심은 분명하게 밝히기 어려워 미묘하니 오직 정밀하게 생각하고 순일하게 도의를 지켜서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아야 한다.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상서』 「대우모(大禹謨)」)
- 인심, 도심에 대한 주희의 해석
허령하면서 영묘, 그리고 명석한 지각의 작용을 갖춘 심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거기에 인심과 도심의 구별이 있다고 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즉 심은 한 측면에서는 형태를 이루는 ‘기’에 의한 사적 편향의 위에 서 있고, 다른 한 측면에서는 천명의 본성에 의한 올바름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지각의 작용도 여러 가지 양상으로 드러나며, 그 때문에 위험하고 안정되지 않은 인심이 있는가 하면 미묘하여 파악하기 어려운 도심도 있게 된다. 게다가 인간은 누구나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상지(上智: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진)의 사람이더라도 ‘인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또 누구나 리에 근거하는 본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하우(下愚: 가장 어리석은)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도심’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이 두 마음이 사방 1촌의 마음 속에 뒤섞여 있는데 이를 잘 정리하는 방법을 모르면 인심은 끝끝내 위태롭게 되고 미묘한 도심은 더욱 알기 어려워지게 되어 마침내는 천리에 근거하는 올바름도 저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길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정밀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인심과 도심의 구분을 잘 파악하여 혼동하지 않는 것이고, ‘순일하게 노력한다’는 것은 그 본래의 마음의 정상을 지켜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 점을 항상 실천하여 반드시 도심이 언제나 내 몸 전체의 주재자가 되고 인심이 언제나 도심의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면 위험한 것도 태평, 안정되게 되고, 미묘한 것은 분명하게 밝혀져 자연히 기거동작이나 언어활동에서도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거나 하는 잘못이 없어져 딱 ‘중(中)을 지킬 수 있게 된다. - 주희 『중용장구』 서문
○ 주희에 의하면 마음의 핵심적 기능은 지각임
○ 지각하는 마음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지만 지각 대상에 따라 인심, 도심으로 구분해 볼 수 있음
○ 인심, 도심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관계처럼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본성이 아님. 본연지성이 기질에 내재한 상태가 기질지성이고 기질지성의 본연성이 본연지성임. 예컨대 인간이라는 기질 속에 떨어져 있는 이치는 추위라는 상황에 당면하여 잎 떨구는 본성이 아니라 입고자 하는 본성임. 추위에 잎을 떨구는 초목의 기질지성이나 추위에 입고자 하는 인간의 기질지성은 모두 본영지성이 낳고 낳는 이치, 즉 '생생지리(生生之理)'가 기질을 경유한 결과임
○ 인심과 도심도 두 마음이 아님. 추위에 입을 것을 깨닫는 마음이 기질지성을 지각하는 인심이라면, 입음의 상황에 그 옳음을 깨닫는 마음은 본연지성을 지각하는 도심임. 인심은 반응의 상황 적합성을 결정짓고 도심은 상황에 대한 반응의 이치 적합성을 결정지음
○ 형기의 사사로움은 성명(性命)에 거스르는 옳지 않음을 함축하지 않지만 만일 사사로움의 경계 너머 본연지성에 대한 자각에 이르지 않는다면 남의 홑옷을 벗겨 내가 덧입고자 하는 것과 같이 옳지 않은 감정으로 결과될 수 있음. 따라서 본연지성에 대한 지각을 강화하는 공부, 즉 도심의 주재성을 확보하는 공부가 요청됨
이황의 인심, 도심에 대한 견해
☞ 전현희, <퇴계와 율곡의 인심도심설: 주자 심론의 한국적 전개>, <<한국철학논집>> 제41집, 한국철학사연구회, 2014
나누어 말하면 인심은 진실로 형기에서 생기고, 도심은 진실로 성명에 근원한다. 합해서 말하면 도심이 인심의 사이에 섞여 나오니, 실상은 서로 돕고 서로 발하는 것으로서 판연히 두 가지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퇴계집>>
인심은 칠정이 이것이고, 도심은 사단이 이것이니, 두 가지의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퇴계집>>
○ 퇴계는 인심도심을 지각하는 마음이 아닌 발현된 감정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했음. 인심이 곧 기의 발현인 칠정과 같고, 도심이 곧 이(理)의 발현인 사단과 같다고 보았음
○ 하지만 인심과 칠정이 완전 동일하다고 보지는 않았음
자사가 희노애락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 것은 옳지만, 만약에 인심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고 한다면 옳지 않다. -<<퇴계집>> 권37, <답이평숙(答李平叔)>
○ 칠정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은 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심은 그렇게 말할 수 없음. 인심은 칠정과 달리 이미 사사로움에 한정된 개념임. 퇴계에서 인심은 인간이 몸을 지니고 있기에 생기는 마음으로 그 발생 원인이 처음부터 형기(形氣: 형체와 기운)로 한정되어 있음
○ 퇴계가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려고 한 이유는 사단이 그 선함을 이(理)로부터 보증 받은 감정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며 사단을 느끼는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선함이 증명되기 때문임. 하지만 그 느낌은 조작 불가능함. 억지로 느끼려 한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님. 사단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감정이지 인위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님. 이 지점에서 도심이 중시됨
=> 사단은 스스로를 확충할 수 없으며 도심에 의해 확충됨. 도심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단지 이치의 발현을 수동적으로 감수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발현된 이치를 적극적으로 유지하고 확대, 지속시키는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