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 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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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ang21c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2월 2일 (금) 10:0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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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1928~1994)의 생태사상

☞ 황종원, <장일순 생태사상의 종교 회통적 성격과 생태기술론적 의의>, <<유학연구>> 58, 2022

  • 장일순은 한국 생태운동의 개창자로 여겨지는 인물임. 1970년대에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이끌었고 1980년대에는 종촌과 도시의 생산, 유통, 소비를 생태적으로 잇는 '한살림운동'의 출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
  • 장일순의 생태사상은 동학사상, 특히 최시형의 사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고,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음
  • 아울러 장일순은 도가, 기독교, 불교를 회통한 인물임
 천지만물이 막비시천주야(天地萬物 莫非侍天主也)라. 한울님을, 생명의 본질을, 본체를 모시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그것은 불가에서 '풀 하나 돌 하나도 부처'라는 이야기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일체 존재에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같이하신다'는 이야기와 그 생명사상은 다 같은 거지요.
  • 인간과 천지만물이 모두 천주를 모신 존재라는 생각은 최시형에게서 가장 분명히 보임
 "우리 사람이 태어남은 하늘의 영기(靈氣)를 모시고 태어남이요, 우리 사람이 살아감 또한 하늘의 영기를 모시고 살아감이니, 어찌 반드시 이 사람만이 홀로 천주를 모셨다 이르리오? 천지만물이 다 천주를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 저 새 소리도 시천주의 소리이다."
 -<<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

=> 최시형은 인간과 천지만물이 모두 하늘님의 영기에 의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만유를 하늘님을 모신 존재라고 확신함. 하늘님의 기운이 인간과 자연 안에 생명으로 내재하기 때문임

  • 장일순은 <<화엄경>>의 "조그마한 티끌 속에 우주가 포함되어 있다(一微塵中, 含十方)"는 말을 자주 인용하며 그것을 생태주의적으로 재해석함. "나락 한 알 속에도, 아주 작다고 하는 머리털 하나 속에도 우주의 존재가 내표되어 있다 그말이에요." "생명의 진수가 물질 하나에 다 있다 이 말이야. ... 이 머리털은 사람이 없으면 안 되겠지? 사람은 부모가 없으면 안 되겠지? 부모는 또 그 부모의 부모가 없으면 안 되겠지? 그 부모나 나는 천지만물, 하늘과 땅이 없으면 안 되겠지? 그렇게 따지고 보면 터록 속에 전 우주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머리털 하나도 시공간적으로 전 우주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듯, 나락 한 알에도 전 우주적 생명이 내재해 있다.
  • 최시형은 밥 한그릇에도 전 우주적 생명, 즉 하늘님이 담겨 있다는 뜻에서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다"고 했음. 장일순은 이 밥 한 그릇 먹는 일에 사람과 천지가 협력해 일하는 우주적인 만남의 의미가 있다고 말함. 밥 한 그릇을 "사실은 사람만이 땀 흘려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일체가 앙상블이 되어서, 하나로 같이 움직여서 그 밥 한 사발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밥 한 사발은 우주적인 만남으로 되는 거지요."
  • 장일순은 유기농이나 자연농을 그 무엇보다 중시했음. 그는 '한살림'운동을 "급속도로 와해되어가고 있는 농촌에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하는 사람이 살 수 있고, 그래서 마침내 살아있는 땅과 마을을 새로운 형태로 돌이키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의 하나"라고 했음. 생태적 농사가 자연의 생명성을 회복시키고 농촌을 건강하게 협력하는 사회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임
 특히 자연농으로 돌아간다는 건 자연과 공생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게 현재로서는 매우 미약하고 또 얼핏 보면 무슨 원시 농경 사회로 돌아가자는 거냐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건 아니지. 다만 지금까지 인류가 겪어온 경험에서 배운 것들을 모아서 파멸을 피하면서 함께 모두 살 수 있는 그런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현실을 얘기하고 있는 걸세.
 -장일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장일순 사상에 깃든 노장사상

  • 장일순은 자신을 일속자(一粟子)라 칭하며 자신을 벌레, 풀잎 등 다른 자연존재와 대등하게 취급하는 마음의 훈련을 했음. 그는 조 한 알이라는 호를 붙인 이유를 "나도 인간이라 누가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지요.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을 지그시 눌러주는 화두 같은 거야."라고 했음
  • '인간-나'를 풀이나 좁쌀의 수준으로 낮추려는 노력은 천지만물과 '나'를 '한 몸'으로 대하기 위한 수양임. '소아'를 비워내고 그 자리에 도, 하느님, 하늘님을 따르는 '대아'를 정립하기 위한 수양임. 이 수양의 방법을 논할 때, 장일순은 노자를 중심으로 기독교, 불교, 동학을 회통시킴
  • 장일순이 말하는 대아(大我)란 이웃, 만물, 천지를 '나'와 동일시하는 '나'임
 화장장에 가보면 뼈까지 다 빻고 나면 재가 한 움큼밖에 안 남는단 말이에요. 그런 어디 갔느냐 이 말이에요. 진실한 '자기'라는, '나'라는 것이 뭐냐. 그걸 따져 들어갔을 때 진실한 '나'라는 것은 보이지 않아. '나'라는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아의 나밖에 존재하지 않아. '너/나'가 없는 거라.
  • 장일순이 말하는 수양의 핵심은 '자기 비움', 즉 '소아'르 제거함임. 이 소아의 제거는 노자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도를 따르는 자연물처럼 되어감임
  • 예컨대 장일순이 노자의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구절을 해설할 때 물이 그럴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함. "물은 주(主)와 객(客)이 따로 없거든. 너니 나니가 따로 없단 말이야. 아상(我相)이 없는 거라."
  • 물은 부드러운 힘으로 흐를 뿐, 어떤 것과도 격렬히 부딪치며 다투지 않는 것처럼 보임. 그러면서도 땅 속 깊이 낮은 곳에 처하여 식물을 비롯한 뭇 생명체들이 생장하는 데 도움을 줌. 장일순은 물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처럼 주객을 분립하고 자타를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함
  • 장일순은 소아의 제거에 관한 가르침을 도가, 불교, 기독교의 공통된 교설이라고 주장함
 불가의 선에 허회자조(虛懷自照)라는 말이 있어요. 자기를 비운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노자의 도덕경에도 있고, 또 성경에도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가 산으로 자꾸 올라가시지요. 세상에 내려가니까 자꾸 따지고 이것저것 얘기를 해. 사람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고 욕심만 부려. 그렇게 되니까 답답해서 산으로 올라가서 어찌아오리까 하거든. 가서 좌선을 해요. 하느님과의 대화란건 뭐냐. 자기를 비우고 스스로 그 비운 마음을 보는 거예요.
  • 도가, 불교, 기독교에서 공통되게 말하는 소아를 제거하는 일은 생태주의적으로 욕심을 없에도 작위를 최소화한 생태적 인간으로 거듭남을 의미함. 장일순은 주로 노장철학과 동학의 생각을 빌려 생태주의적으로 거듭나라고 권함
  • 예컨대 장자는 심재(心齋)를 설명할 때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으라"라고 했음. '귀로 들음'과 '마음으로 들음'은 각각 감각적 지각과 지성적 인식을 가리킴. 장자는 이 두 인식 기능으로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도를 알 수 없고, 오직 '기로 들을 때', 즉 '마음을 비우고 사물을 기다릴' 때만 그것을 체득할 수 있다고 했음
  • 장일순은 장자의 심재에 대해 이렇게 말했음
 우리가 이렇게 개인적으로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전부 눈에 보이는 거, 듣는 거, 또 만질 수 있는 거, 감각으로써 느끼는 거 속에서만 산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그런 그 속에 근본적으로 우리가 터득해야 할 것이 있느니라 그런 얘길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욕심을 버리라는 얘기죠.

=>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것에 대한 욕심, 즐 물욕을 버리고 만물의 궁극적 근원으로서 지각되지 않는 그 무엇을 체득하는 훈련이 생태적 인간에게는 필요하다는 뜻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