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인간본성론: 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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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朱熹, 1130~1200)라는 인물
☞ 미유라 쿠니오 지음, 김영식, 이승연 옮김 『인간 주자』, 창작과 비평사, 1996
☞ 진래 지음, 안재호 옮김 『송명성리학』, 예문서원, 2011
- 중국 푸젠(복건) 유시(우계(尤溪))현에서 태어났음. 그의 아버지가 복건성에서 벼슬하면서부터 이곳에 살았음
- 14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심. 아버지 주송의 인덕으로 덕분에 아버지 지인의 도움으로 집을 마련하여 살게 됨
-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절친한 벗 세 사람(호적계, 유백수, 유병산)에게 배웠으며, 이 때 학문은 과거 공부와 같은 명예와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됨
- 16, 17세 때부터 독서에 집중함.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닥치는대로 읽어나가기만 했다고 함
- 19세에 과거 시험에 합격함. 330명 중 278번째 성적으로 그다지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음. 하지만 당시 18세는 3명, 19세 합격자는 주희를 포함해 5명 정도로 어린 나이의 합격자였음
- 주희는 자신을 위한 학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했지만 사대부로서 영예와 책무였던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됐음
- 20세가 지나서는 과거공부에서 해방되어 독서의 범위를 넓혀 다양하게 책을 읽어나감
- 24세 나이에 관직에 나감. 첫 부임지는 지금 샤먼(하문, 厦門)에 위치한 통안(동안, 同安) 지역임. 당시 직책은 세금 출납부를 점검하고 장부를 담당하는 주부의 직책으로 매우 철저하게 일을 수행했음
- 젊은 시절 주희는 불교와 도가에 심취했음. 여러 학문에 대해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
- 하지만 첫 부임지에 있을 때(24세) 이동(李侗)('이연평(李延平)'이라고 도 함)을 만나게 되고 첫 부임지에서 귀향하는 길(29세)에 다시 만나 31세 겨울 세번째로 만났을 때에는 수개월간 스승 곁에 머물며 가르침을 받게 됨. 이동의 생애는 주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으나 세상에 알려지기 원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그 경력이나 행적은 불분명한 부분이 많음
- 이동을 만난 이후 도학의 발전을 위한 길을 걷게 됨
- 주희는 행정 책임자의 일을 맡아 많은 업적을 쌓았는데 그 행정일을 잘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음. 당시 가장 명망 있는 학자로 존경받게 됨
- 특히 불교와 도교에 비해 사상적인 약점이 있었던 송대 성리학의 우주론, 인간론을 보완하는 작업을 하게 됨
- 주희의 주요 업적 중에 하나는 ‘사서‘ 체계를 확립한 것인데,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합하여 사서로 편집했고 이후 사서가 오경(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보다도 더 중요한 경전 체계가 되었음
- 주자의 문인의 수는 약 8, 9명 정도에 달하며 주자를 한번이라도 접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을 포함하면 거의 2, 3천 명에 달할 것으로
보임
- 주자는 제자들과 함께 자주 학문적 토론을 벌였음. 제자들이 묻고 주자가 이에 대해 대답하는 형식의 문답이 무수히 되풀이되면서 주자의 학설은 보다 명확해졌음. 그의 이러한 문답의 기록은 『주자어류』 140권 분량의 저작에 남겨져 있음
- 주자는 남송시기 고종, 효종, 광종, 영종 4명의 왕을 섬겼음. 광종은 일찍부터 주자의 명성을 들었고 곁에 두고 싶어 했음
- 1194년 황제의 측근 브레인으로 삼는다는 사령이 내려졌고 두 번에 걸쳐 사퇴했지만 그 명을 받아들이게 됨. 황제에게 강의를 진행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며 자기의 이상을 황제에게 진언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 생각했을 것임
- 하지만 주자의 기탄없는 직언이 한탁주의 노여움을 사고 45일 만에 중앙정부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됨
- 송나라에서는 왕안석(1021~1086)의 신법을 지지하는 신법당과 이를 반대하는 구법당 간의 갈등이 이어져오고 있었음. 왕안석의 신법은 국가재정의 안정, 빈농과 상공업자 구제를 통해 이들 중산계층을 육성하겠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지만 실효성 있게 운영되지 못하면서 백성들이 피해를 입게 됨(예를 들어 저리로 대출해주는 정책이 있었는데 정작 현실에서는 대출 신청절차를 받을 때마다 관리들에게 더 많은 뇌물을 주어야했고, 또 의무적으로 지켜야하는 대출 하한선을 정해서 대출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백성들에게까지 억제로 대출을 강요하는 상황 등이 벌어졌음). 이러한 신법의 폐혜를 비판했던 구법당 가운데에는 도학자들이 있었고 신법당은 구법당을 철저히 탄압했음. 그 여파가 주희에게까지 미쳤음
- 송나라는 북송시기(960~1127)와 남송시기(1127~1276)로 나뉘어짐. 1127년 이후 송나라가 여진족이 이끄는 금나라에 밀려 북쪽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남쪽으로 쫓겨 내려가 수도를 개봉에서 임안(지금의 항저우)으로 옮기게 됨
- 주희는 바로 이 남송시기에 태어난 인물임. 북송시기 신법, 구법당의 치열한 당쟁은 남송시기에 이르러 형태를 바꾸어 금에 대한 정책을 둘러싸고 다시 재연됨. 화의파와 주전파의 싸움이 그것임. 화의파를 주장하는 관료들은 대부분 왕안석의 신법당 흐름을 계승했고 대의명분에 의거하여 항전을 주장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학자였음. 즉 화의파=신법당, 주전파=구법당의 구도로 바뀜
- 특히 황실과 외척관계를 맺고 있던 한탁주(1152~1207)는 신법당에 가까운 인물로 도학을 거짓된 학문이라는 뜻의 ‘위학(僞學)’이라고 일컬었음. 그리고 그 여파가 주희에까지 미치게 됨. 주희에 대한 탄핵이 진행되었고 그 탄핵문에는 그가 불효자이고 제자들에게 높은 수업료를 요구했다는 등 그가 부도덕하고 청렴하지 못했다는 내용을 담게 되고 주희는 결국 파면당하게 됨
- 그 이후에도 권력자들의 도학파에 대한 공격은 끊이지 않았음. 주희(1130~1200)가 죽을 때까지 도학은 거짓된 학문으로 금지당했으며, 그것이 풀린 것은 1202년에 들어서서였음
- 학문적, 정치적 탄압을 받으며 주희의 제자들이 그의 곁을 떠나갔고 변절하여 주희에게 배웠다는 것조차 숨기고 속이기까지 했음. 주희는 말년에 자신의 불행보다 제자들과 함께 쌓아올린 자신의 학문이 단절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음
- 그리고 질병과도 사투를 벌였음. 다리의 질환은 40대 후반부터 시작되었고 심할 때에는 땅을 밟지 못할 정도였음. 누워지내지 않으면 안되는 정도도 되었음(아마도 류머티즘의 일종)
- 눈병이 있었는데 60대에 이르러 왼쪽 눈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음. 특히 자신의 학문이 금지당하면서 더 악화되었음
그럼에도 저술 작업은 끊이지 않았음
- 1200년 3월 죽음을 맞이하게 됨. 모두 힘을 모아 열심히 공부하고 발을 굳게 땅에 붙여야만 진보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을 제자들에게 남김
- 그는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했고 나중에도 거의 벼슬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웠음. 진사 급제 후 50년 동안 외지에 나가 벼슬한 것도 아홉 번에 불과했고 조정에 있었던 기간도 겨우 40여일 뿐이었음
- 각지에서 찾아와 배우려는 학생들은 스스로 먹을 양식을 가지고 왔음. 식탁에는 늘 고기 음식이 없었고 거친 현미밥만 있었음. 평생동안 저술과 강학 활동이 그의 삶의 기쁨이었음
- 주희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사회의 기강을 확립하며 충신과 어진이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며 풍속을 변화시키고 사회의 불량한 기풍을 바로잡도록 요구했음
- 그는 이러한 일들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음
무엇이 이렇게 파란만장한 주희의 삶을 온전히 겪어내게 할 수 있었을까요? 정신차릴 수 없는 풍파 속에서도 자신이 정신차리고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철학을 여러분은 가지고 있나요?
=> 주희는 이치(理)가 사물보다 앞선다는 이(理)를 중시하는 사상을 제시함. ‘이'는 사물의 규율과 도덕원칙으로서 ‘이’를 절대화하는 사유를 제시했음
성리학의 공통된 문제의식들
☞ 진래 지음, 안재호 옮김 『송명성리학』, 예문서원, 2011, 41쪽
- 선진(先秦: 진나라 이전) 시기에 시작된 유가사상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주론적·본체론적 논증을 제공했음
- 유가의 성인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생각하고, 성인의 정신 경지 실현을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 삼았음
- 유가의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도덕의 근본 원리로 여기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유가의 도덕 원리가 내재적 기초를 지니고 있음을 논증하며, 하늘이 부여해준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욕심)’을 제거하는 일을 도덕 실천의 기본 원칙으로 삼았음
- 인간 정신의 전면적인 발전을 실현하기 위해 각종 공부법, 즉 구체적인 수양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했음. 이러한 공부법의 내용들은 주로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와 초기 도학의 토론 가운데에서 제시되었으며, 특히 심성 공부에 집중되었음
=> 어떻게 하면 공자와 같은 사람, 안연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그 이론과 공부법에 몰두했음
주희의 철학
☞ 진래 지음, 안재호 옮김 『송명성리학』, 예문서원, 2011
주희의 이기론
- 주희는 경험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파악하고, 기의 작용 및 운동의 법칙과 그것의 원인이 되는 사물의 질서를 리로 파악함. 이때의 리는 경험적으로 지각할 수 없지만 그 실재를 상정할 수 있는 (형이상의) 존재임
- 기는 현실 속 사물을 이루는 물질적 요소며, 사물의 운동은 모두 기의 작용임. 그리고 기의 세계의 근본적 법칙, 질서가 리임.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리는 우주, 만물의 근거며 우주로 하여금 본래의 모습을 부여해주고 있는 원리고, 개별적으로 말하자면 개개의 사물을 각각의 사물답게 만들어주고 있는 원리임
- 주희는 자연계의 양상을 리와 기로 설명하고 동시에 인간의 마음도 리와 기로 분석해냈음. 즉 마음을 ‘리인 성’과 ‘기인 정’으로 나누고, 구체적인 마음의 발동인 정을 기로 여긴 다음, 그 정의 법칙을 성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연계와 인간의 마음의 일관성을 주장하여 존재론과 가치론의 일체화를 추구하였음. 즉 리를 향한 탐구는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는 문제(인식론, 존재론)임과 동시에 인간이 그렇게 해야 할 바(가치론, 윤리론)가 됨
리일분수(理一分殊)
- 개인은 우주 안에서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다른 사람이라 사물에 대해 일정한 의무를 지님. 그러나 관계와 지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개인적인 의무에도 차이가 있게 됨
- 하지만 도덕 원칙은 일치함. 도덕의 기본 원칙은 서로 다른 도덕 규범으로 표현되며 구체적인 규범 속에도 보편 원리가 관통함